
퇴근길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스크롤하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 예고편을 봤습니다. 제목부터 묘하게 신경 쓰이더군요. HUMINT, 인적 정보 수집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행정 관리직으로 일하면서 규정과 매뉴얼을 달고 살지만, 정작 복잡한 인허가나 폐기물 처리 문제는 책상 위 서류로 풀린 적이 거의 없습니다. 결국 현장 담당자분과 커피 한 잔 나누며 "실제로는 이렇게 합니다"라는 조언 한마디가 수십 페이지 지침서보다 강력하더군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에서 나오는 진짜 정보, 그게 바로 휴민트 아니겠습니까.
액션 영화로서의 완성도
<휴민트>를 보기 전, 저는 치밀한 심리전과 첩보전을 예상했습니다. 제목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죠.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이건 20% 첩보, 40% 멜로, 40% 액션으로 구성된 액션 로맨스 영화더군요. 류승완 감독 특유의 가열찬 액션 시퀀스(Action Sequence)가 영화 전체를 압도합니다. 여기서 액션 시퀀스란 하나의 액션 장면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의 연속된 동작 구간을 의미합니다. 조인성의 액션 연기는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 시리즈에 비견될 만큼 정교하고 박력 있었습니다.
특히 중반부 큼직한 액션 장면들과 후반 구출 작전 시퀀스는 이 영화가 액션 영화로서 얼마나 탄탄한지 보여주는 핵심 구간이었습니다. 도시의 어둡고 차가운 색감, 실내 조명과 미장센(Mise-en-scène)까지 완벽하게 계산된 비주얼도 인상적이었죠. 미장센이란 프레임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배우의 위치, 소품, 조명, 색감을 총칭하는 영화 용어입니다. 류승완 감독이 즐겨 쓰는 스플릿 포커스 디옵터 기법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이는 화면 앞뒤를 동시에 선명하게 보여주는 특수 렌즈 기법으로 관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분산시키거나 긴장감을 높일 때 효과적입니다.
사운드트랙 역시 반복적이지만 세련되었고, 대본의 감칠맛 나는 대사들도 부분적으로 감지됩니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의 액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류승완 감독의 초기 3부작<짝패>, <부당거래>, <베를린>을 가장 좋아하는데, <휴민트>는 그중에서도 <베를린>의 냄새가 가장 많이 납니다.
홍콩 누아르 오마주의 양날
이 영화는 류승완 감독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영화입니다. 역대 작품 중에서도 홍콩 영화의 영향이 가장 짙게 느껴지죠. 홍콩 누아르(Hong Kong Noir)란 1980~90년대 홍콩에서 유행한 범죄·액션 장르로, 어둡고 비관적인 세계관, 쌍남 주인공 구조, 비극적 결말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휴민트>는 이 홍콩 누아르의 문법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 임영동의 <용호풍운>, 두기봉의 <엑사일>, 진목승 감독의 <천장지구> 같은 홍콩 명작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됩니다. 쌍남 구조(두 남자 주인공), 배신과 우정, 비극적 운명 같은 요소들이 <휴민트>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저처럼 90년대 홍콩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라면 이 기시감이 반갑고 익숙할 겁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관객들은 이 문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의문입니다.
제 경험상 홍콩 영화 특유의 과잉된 감정 표현과 비극적 서사는 현대 관객들에게는 다소 낡아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멜로 파트가 약한 상태에서 홍콩 누아르 특유의 감정 과잉이 더해지면, 관객 입장에서는 오히려 거리감이 생길 수 있죠. 남녀 관객의 평가도 갈릴 가능성이 큽니다. 액션을 선호하는 남성 관객들은 만족하겠지만, 멜로에 기대를 건 여성 관객들은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 영화 관객의 약 55%가 여성이며, 멜로 장르에 대한 선호도가 남성보다 높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런 관객 구성을 고려하면, <휴민트>의 멜로 파트 약점은 흥행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액션 영화는 남성 관객 비중이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멜로가 탄탄하면 여성 관객도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류승완만 할 수 있는 영화
<휴민트>는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액션, 비주얼, 사운드 모두 수준급이고, 류승완 감독 특유의 연출력이 돋보입니다. 하지만 요즘 관객들의 취향을 정확히 겨냥한 영화는 아닙니다. 관객이 이 영화를 따라와 줄지가 관건이죠.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행정 업무에서 느낀 딜레마와 비슷한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완벽한 매뉴얼이 있어도 현장 상황과 맞지 않으면 소용없듯이, 완벽한 액션과 연출이 있어도 관객의 감정선과 맞지 않으면 몰입이 어렵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액션 영화로서의 완성도는 A급이지만, 멜로 완성도는 B급 수준
- 홍콩 누아르 문법은 특정 세대에게만 어필할 가능성이 큼
- 류승완 감독의 작가적 색깔은 분명하지만,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음
개인적으로는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이 류승완밖에 없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업 영화 시장에서 자기 색깔을 이만큼 유지하면서 대작을 만드는 감독이 몇이나 될까요. 완벽하지 않아도, 이런 시도 자체가 한국 영화계에는 소중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제 업무 현장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완벽한 시스템보다 중요한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휴민트>라는 제목이 주는 무게감만큼, 이 영화가 '사람'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도 류승완 감독의 다음 작품은 또 기다려집니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영화는 여전히 건강하니까요.